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하던가? 대기업 협력사 사장으로 있다가 회사를 넘기고 후배가 하는 조그만 회사에서 고문으로 일한지 벌써 3년이 지나고 있다. 고문이란 역할이 일주일에 한두 번 후배 회사에 가서 점심이나 먹고 필요시 자문 정도 해주면 되는 것이기에 넉넉한 시간 속에서 그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골프도 하고 문화원에 등록하여 책도 보며 소일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대기업 회사원으로서, 중소기업 대표로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내 자신에 대한 위로와 보상 차원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소일하는 것이 진정 내 자신에 대한 위로와 보상이 될까 의문이 들면서 마음 속에 허전함과 갈증이 쌓여가던 중, 행복공장에서 주말 릴레이 성찰프로그램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참가 신청을 하였다.
토요일 아침 간단히 짐을 꾸려 차를 몰고 나섰다. 자청해서 1.5평 독방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루 종일 1.5평 독방에 갇혀있을 것을 생각하니 답답하게 느껴지고, 하루만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이고 하였다.
행복공장 홍천수련원에 와서 수의를 연상케 하는 푸른 색 옷으로 갈아입으니 영낙없이 죄수가 된 기분이다. 오리엔테이션과 가벼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2시쯤 독방으로 들어갔다. 독방 안에서 하루 종일 담배를 참으며 고통스럽게 있어야 하고, 밖에도 나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다시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핸드폰이 없어 답답하기도 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몰라 안절부절하며 멍 때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어느 새 저녁이 되었는지 문 아래 배식구로 식사가 들어왔다. 쉐이크랑 고구마 한 개.. 평소 저녁식사에 비해 턱없이 적다. 설마 이걸 먹고 아침까지 견디라는 것은 아니겠지 했는데, 그게 다였다.
방 안에 있는 이름 모를 차(나중에 들으니'황차'라 한다)를 끓여 마시니 맛이 오묘하다. 연거푸 두 잔을 마시고, 다시 멍때리기를 하다가 탁자 위에 놓여 있는'내 안의 감옥에서 나오기-휴휴'라는 워크북을 열었다.
첫 장에 '인간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방에 혼자 조용히 머무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파스칼의 글이 쓰여 있다. 잠시 지난 삶을 돌아보며 이 말의 뜻을 음미해본다. 그 동안 온전히 내 자신을 독대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 돈과 지위에 대한 열망 속에서 정신없이 앞만 보며 달리고, 현재의 행복은 뒤로 미룬 채, 세속적 욕망의 감옥에 갇혀 살아온 삶은 아니었나? 파스칼의 문구에 내 삶을 비추어보면서, 불현듯 독방 안에 있는 이 시간이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몇 장을 더 넘기니,'지난 삶 돌아보기'라는 항목이 나온다. 내 인생에 있었던 중요한 일들, 기뻤던 일, 슬펐던 일, 행복했던 일, 불행했던 일을 하나하나 써보니 마음이 절로 차분해졌다. 두 딸이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 부모님을 여의었을 때의 슬픔이 교차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와 5남매를 뒷바라지하느라 오랫동안 행상을 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계속해서 워크북을 채워나가다 보니 어느덧 한밤중이다.
워크북도 다 했으니, 이제부터 뭘 할까? 낮잠을 많이 자 잠은 안오고 담배 생각만 간절하다. 담배를 잊기 위해 오리엔테이션 때 배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고관절이 좋지 않아 다소 불편한 자세로 30번 정도 했을까? 더 이상 못하겠다고 몸이 저항한다. 남들은 108배도 거뜬히 하는데 고작 30번도 못하다니, 그 동안 제대로 돌보지 않고 혹사시킨 내 몸에게 미안해진다.
이제부터 절은 그만하고 내 몸과 대화를 해야겠다. 명상 자세로 앉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대화를 나눈다. 괜찮은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하고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게 해준 약간은 똑똑한(?) 머리에 감사드리고, 당뇨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췌장에게 사과하고...이런 식으로 나의 사지와 오장육부와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내 안에 있는 세포가 하나하나 살아서 숨 쉬는 존재로 다가오고, 무심코 지나쳤던 '나 아닌 다른 존재들'도 신비하게 다가왔다.
창문을 여니, 깜깜한 하늘에 별은 반짝이고, 시원한 밤바람이 분다. 늘 곁에 있었지만,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별빛과 밤바람이 새롭게 느껴진다. 너무나 당연히 여겨 감사할 줄 모르고 신비로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 속에 빠져든다. 새벽 6시 기상 음악에 맞추어 일어나 50배쯤 절을 하다가 그만두고 호흡 명상을 하였다. 8시에 배식구로 땅콩죽이 들어와 맛있게 먹고, 창밖을 보다 보니 어느덧 10시, 독방 문이 열리자, 나와 마찬가지로 1.5평 독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사람들이 환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준다.
하루를 잘 견뎌낸 내 자신과 이 자리를 만들어주거나 함께 참가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행복감이 밀려온다. 길어야 몇 십 년이면 이 세상 떠날 텐데, 이제부터는 아등바등하지 말고 나에게도 남에게도 관대해지고, 감사하고 배려하면서, 그리고 가끔은 내 자신과 이렇게 욕심 없는 대화도 나누면서 즐겁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