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웹진 잇다] 방에 갇힌 청년들에게 '연극'이 출구로 향하는 안전지대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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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1은 10대 시절 학교 폭력을 당하며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게 됐다. 꾸준히 약을 먹어도 집 밖을 나서면 심장이 아플 만큼 뛰어서 대학을 휴학했고,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있는 청년들과 만난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어색함과 당혹감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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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2는 ‘공부 열심히 해서 힘을 키워 남들 위에 서야 한다’는 부모의 압박에 짓눌려 산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격증 시험도 보고 입사 지원서도 넣어보지만 번번이 낙방해서,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며 점점 더 위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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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3의 유년 시절은 가정 폭력으로 물들어 있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아버지는 별것 아닌 일로 그와 어머니를 때리고, 아버지에게 맞고 사는 어머니는 그에게 신세 한탄을 하며 ‘감정 쓰레기통’ 취급한다. 친구 하나 없는 학교도, 의지할 식구 하나 없는 집도 모두 그에게는 안전하지 못한 공간이다.
지난 7월 1~2일 서울 종로구 명보아트홀에서 상연된 연극 <출구 없는 방>은 고립청년 세 사람의 이야기다. 무대에 오른 배우 10명 중 9명은 고립청년 당사자로, 무대에 서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연기’하기 위해 용기를 끌어모은 이들이다. 고립청년들을 방 밖으로, 나아가 무대 위로 이끈 것은 2009년부터 연극을 매개로 한 심리 치유·성찰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비영리단체 ‘행복공장’으로, 지난해부터는 고립청년을 대상으로 한 연극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출구 없는 방> 각본의 윤곽이 서서히 잡혀가던 ‘2022 고립청년 생활연극학교’ 1차 캠프의 마지막 날, 행복공장이 홍천군 남면에 마련한 ‘성찰공간 빈숲’에서 권예철 연극 강사를 만났다. 그는 행복공장을 만든 故 권용석 변호사와 노지향 연극공간 해(解) 대표의 아들로, 행복공장과 연극공간 해에서 치유 연극 지도·기획과 즉흥 연주 활동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다.
2022 고립청년 생활연극학교’ 1차 캠프 마지막 날인 지난 6월 10일, 노지향 연극공간 해 대표(왼쪽)와 권예철 연극 강사가 3박 4일 일정을 마무리하며 참가자들과 소감을 나누고 있다.
Q. 행복공장은 재소자, 소년원 입소 청소년, 장애인 등 문화예술 사각지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극을 매개로 한 교육·치유 활동을 이어왔고, 작년부터는 고립청년을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고립청년 대상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권예철 ‘청년 문제’ 하면 ‘취업’ ‘실업’이 가장 많이 다뤄져왔는데, 2~3년 전부터 청년 고립, 청년 고독사와 같은 문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 청년 고립이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행복공장도 이 문제를 인식하게 됐는데, 좀더 일찍 이 문제를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고립청년을 대상으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탐색하던 중, 작년에 서울시 후원으로 청년 대상 평화통일 연극 캠프 ‘비더피스(Be the Peace)’를 기획하게 됐고, 기왕이면 고립청년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국내 고립청년 지원단체인 K2인터내셔널 코리아1, 푸른고래 리커버리센터와 협력해 참가자를 모집해서 연극 워크숍이 포함된 캠프를 진행했고, 캠프를 통해 만들어진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올해는 생명보험사회공원위원회, 교보생명, 함께만드는세상의 후원으로 ‘고립청년 연극으로 세상에 말하다’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지난해에 이어 행복공장은 올해 ‘고립청년 연극으로 세상에 말하다’라는 제목 아래 연극 워크숍·가족 캠프·공연 등을 진행했다. ⓒ행복공장
Q. ‘고립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권예철 ‘청년’은 특정 나이대를 가리키는 말인데, ‘고립’ 상태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진정으로 ‘나’를 이해하는, 그래서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한 명도 없는 상태인 것 같다. 여태껏 만나본 고립청년들 가운데 “정말로 나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힘든 이야기를 해도 외면하지 않고 지지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었어도 고립되거나 은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청년들이 고립되는 일차적인 이유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서,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아서, 가정 폭력을 당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어서 등 다양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기댈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어서다.
Q. 올해 진행 중인 ‘고립청년 생활연극학교’, ‘고립청년 가족힐링캠프’는 어떤 프로그램인가.
권예철 생활연극학교는 3박4일 연극 워크숍 캠프 2회로 구성되고, 여기서 만들어진 연극을 참가자들이 직접 무대에서 상연한다. 생활연극학교에서는 고립청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끄집어내 제3자의 시선으로 성찰해보고, 내 이야기가 예술이 되는 걸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다른 참가자들과 유대감을 쌓는 시간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어 직접 배우로 참여하고, 공연에 가족을 초대하는 과정을 거친 후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방으로 들어가 고립되지 않도록, 좀더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지난 6월 성찰공간 빈숲에서 진행된 생활연극학교 현장. ⓒ행복공장
고립청년이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 환경이 바뀌지 않아서 가까스로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고립되는 사례가 많다. 가족힐링캠프는 고립청년의 가족 관계를 회복하는 것, 가정환경을 좀더 평화롭고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기획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연극학교에 비해 연극 워크숍 비중은 낮은 편이고, 참가자들이 ‘나’를 온전히 들여다보며 마음을 회복하고 휴식할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립청년 부모님들도 본인의 힘들었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펑펑 울었다고 하시더라. 내심 ‘가족’에 관한 성찰과 공유가 더 많이 이루어지길 바랐지만(웃음)...
가족힐링캠프의 연극 워크숍은 고립청년과 가족이 속마음을 나누는 시간이다. ‘가족 간 소통이 안 된다’고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가족끼리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경우가 많다. 대화라기 보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제발 밖으로 나와라” 하고 다그치는 식이다. 캠프를 통해서, 그리고 연극을 통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속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길 바란다. 그렇게 “우리 딸, 아들이 이런 상황이구나”, “우리 부모님은 이런 기분이구나” 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고,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조금씩 가족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면 좋겠다.
지난 4월 성찰공간 빈숲에서 열린 가족힐링캠프 현장. ⓒ행복공장
생활연극학교와 가족힐링캠프 참가자가 겹치기 때문에 전체 프로그램 참여자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단 몇 명이라도 인생이 바뀌고, 그 결과 그들 주변 사람들도 좀더 행복해진다면? 연못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가 수면에 넓게 물결을 일으키는 것처럼, 프로그램 직접 참가자 수는 몇 십 명이지만 간접적으로 혜택을 얻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이라 생각한다.
오프라인 공연을 온라인으로 송출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아직은 방에서 나오기 어려운 고립청년들도 온라인으로 자신과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하고 위안을 얻었으면 한다. 이런 위로가 어떤 시작이 될 수도 있으니까. 생활연극학교가 방 안의 고립청년에게 ‘나도 저기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방 밖으로 나서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Q. ‘고립청년 연극으로 세상에 말하다’는 고립청년을 위한 예술 치료 프로그램인 동시에, 연극 치료 지도사 자격을 부여하는 ‘생활연극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내면 치유를 넘어 사회적 자립을 위한 길을 열어주려는 세심한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예철 고립청년 지원 프로그램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먼저 방 안에 있는 고립청년들을 찾아내야 한다. 현재 안무서운회사, 푸른고래 리커버리센터 같은 기관이 이런 역할을 주로 하고 있다. 고립청년들을 찾아낸 다음에는 집을 떠나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등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는 하드웨어 차원과,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립할 힘을 키우는 소프트웨어 차원의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
소프트웨어 차원의 지원 프로그램의 경우 고립 경험이 있는 사람이 프로그램 진행자로 참여할 때 더욱 도움이 된다. 고립을 겪었던 청년들이야말로 고립청년의 상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이들을 가장 안전하게 밖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행복공장이 고립청년 대상 프로그램을 생활연극전문가 양성 과정과 연결해서 진행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고립청년이 예술을 매개로 다른 고립청년을 치유할 능력을 갖춘 교육자로 성장하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올해 캠프에도 작년 ‘비더피스’ 참가자 중 생활연극전문가 3급 자격을 수료한 2명이 프로그램 조교로 참여했다. 이렇게 고립청년이 예술 교육자 역할을 경험해보고, 현장에서 예술가와 교육자의 자질을 계발해 '참가자'에서 '진행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Q. 행복공장은 문화예술 장르 중에서도 '연극'에 주목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연극’이 ‘성찰’과 ‘치유’에 효과적인 언어인가.
권예철 예술은 직접 겪은 사건을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을 비롯해 음악이나 미술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이 치료의 매개로 활용되는데, 그중에서도 연극은 우리 일상과 가장 닮아있다. 누구나 각자 주어진 역할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연극은 그 어떤 예술 장르보다도 우리의 삶과 유사하고, 가깝게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또 생활연극학교에서는 대본에 짜인 대로 타인의 역할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연기하기 때문에 누구나 배역에 공감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한편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연극 워크숍 과정을 힘들어하는 참가자도 있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고 그걸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캠프 참가자 중에도 “전쟁을 겪은 사람에게 폭죽 소리가 전쟁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연극도 제3자에게는 그저 연기일 뿐이지만 그 이야기를 직접 겪은 사람에게는 폭죽 소리 같은 것일 수 있다”며 힘들어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 평생 폭죽 소리를 피해 다닐 수는 없지 않나. 불행히도 방 밖으로 나오게 되면 폭죽 소리 같은 일을 또 겪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래서 “여기서는 안전하다, 이곳은 안전한 공간이고, 악의를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힘들면 언제든 멈출 수 있다”고 강조한다. 연극은 실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에 가장 안전한 방식이라고. 힘든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놓다 보면 ‘이젠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영영 회피할 수 없는 것을 연극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마주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당장은 힘들지라도.
지난 7월 2일 서울 종로구 명보아트홀에서 열린 <출구 없는 방> 공연 장면(온라인 송출 화면 갈무리). ⓒ행복공장
Q. 고립청년들과 함께 만든 연극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나 장면이 있다면.
권예철 어려운 질문이다. 모든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클라이맥스여서… 이번 캠프에서는 “내가 참을게”라는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대사를 들을 때마다 뒷목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맞았던 주인공이 어머니에게 “아버지랑 이혼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집안 분위기도 나아지고 있으니 그냥 네가 참아라”라고 답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냥 참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 같다.
작년에는 ‘평화통일’이 즉흥연극캠프의 주제였는데, 평화통일과 청년 고립을 연결하는 게 쉽진 않았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를 소생시켰다(웃음). 이승을 떠도는 안중근 의사의 혼령이 고립청년 눈에만 보인다는 설정이었다. 극 중 안중근 의사가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 타지에서 긴 시간 고립됐다가 죽음을 맞이했고 혼령이 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나라는 분단돼 있고, 사람들은 별것도 아닌 문제로 싸우고, 모두 불행하게 살고 있다’며 한탄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으니 나라의 평화도 먼 얘기구나”라는 대사가 나온다. 캠프 참가자들과 함께 만든 대사인데, 행복공장이 추구하는 바와도 연결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세상을 가장 빨리 바꾸는 방법이 아닐까.
그래서 ― 행복공장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고립청년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곳에서 작든 크든 행복한 순간을 많이 경험하고, 그 순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디딤돌이 된다면 좋겠다.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꽃길이 되고, 그 길이 다시 누군가에게 꽃길을 열어주는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1) K2인터내셔널 코리아는 2021년을 끝으로 문을 닫았고, K2의 주요 활동가 4명이 K2의 유산을 이어받아 '안무서운회사'를 설립해 고립청년 지원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출처: 강원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_ http://gwcf-eatda.kr/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