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석이 훌쩍 떠난 게 너무도 아깝고 아쉬워서 지향의 주선으로 두 내외가 못다 한 말들을 글로 엮어 여기 내놓았습니다. 그를 다시 만난 듯 반갑습니다. 이 책이 아니면 나는 그를 저세상에서도 다시는 못 볼 뻔했습니다. 지금 그가 있는 하늘나라에 갈 자신이 도무지 없어섭니다. 미안합니다.”(호인수 신부·시인)
행복공장 설립자 권용석 변호사가 떠난지 1년이 됐다. 50대에 홀연히 떠나버린 그가 너무 그리워 슬픔에 젖은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 소풍에서 숨겨놓은 보물찾기처럼 어디선가 보석 같은 글들이 감춰져 있다가 그가 간지 1년만에 나타났다. 고인이 암 투병하며 죽음을 앞두고 써내려간 글들에다 그의 부인 노지향이 본 권용석을 그려 <꽃지기 전에>(파람북 펴냄)를 냈다.
권용석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검사로 10년, 변호사로 15년을 살았고, 2009년 사단법인 행복공장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지내다가 지난해 5월20일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13년 전 재산을 털다시피 해 강원도 홍천에 1.5평 남짓한 독방 28개가 있는 ‘감옥 수련원’을 지었다. 검사 시절 늘 새벽 1~2시에 퇴근하는 등 일주일에 100여시간씩 일하는 격무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감옥에 보낸 피의자들처럼 감옥에 들어가서라도 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스스로 들어가는 감옥 수련원을 만들었다.
치유 연극인인 부인 노지향 ‘연극공간 해’ 대표와 함께 홍천 수련원을 운영하는 행복공장을 설립한 고인은, 법무법인 대륙아주를 비롯해 친구들과 지인들, 기업의 후원을 받아, 주로 비행을 저질러 6호 처분을 받은 소년·소녀들이나 고립 청년들이 2박3일간 수련원에 머물며 성찰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무료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고인은 10년간 갑상샘암으로 시작돼 여러 곳에 전이된 암투병을 하면서도 행복공장을 통해 불우 청소년들의 치유를 도왔다.
책에 남긴 권용석의 글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4,5년부터 쓴 것들이다. 짧은 그의 시는 성공과 탐욕이 아닌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한 영혼의 사리다.
‘포승줄 묶여 허이허이 가는 사람 보면서/ ‘이런 나쁜 놈’하고 돌멩이 들었다가,/ 그가 하는 말 가만히 듣고/ 슬며시 돌멩이 내려놓는다.’
그가 쓴 ‘죄인’이란 시다. 그는 죄를 캐내 벌을 주는 검사였지만, 여느 검사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 이전의 상처와 아픔을 보았고, 그의 환경을 살폈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저버릴 수 없는 영혼이었다.
고인은 부인인 노대표가 하는 연극 공연 가운데도 소년원 아이들과 하는 치유연극 공연엔 빠짐없이 갔다. 그럴 때면 소년원 아이들은 전직검사인 권용석을 신기해했다. 소년원의 아이들은 평소엔 검사를 싫어했지만, 검사를 했다는 남자가 옆집 아저씨처럼 먹을 걸 양손에 가득 들고 와서 털털하게 함께 웃고 박수를 쳐주니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권용석·노지향 부부는 강원도 홍천 감옥수련원 행복공장에서도 6호 처분을 받은 아이들이 오면 함께 연극을 하고, 산책을 하고, 장작불을 태우면서 마치 이모 삼촌처럼 함께 했다.
그래서 김기석(청파교회) 목사는 “그가 홍천에 공들여 일군 행복 공장은 도무지 행복과는 무관해 보이는 이들, 세상을 두렵게 바라보는 이들을 초대해 행복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행복공장 공장장 노지향은 못다 이룬 남편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 사랑을 경험한 이들이 세상 도처에 흩어져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희망은 그렇게 소리 없이 자란다.”고 응원했다.
또 금강 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은 “한 사람에게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면 세상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공적 역할이 큰 사람은 크게, 작은 사람은 작게 변화가 일어난다. 역할이 크든 작든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느 외진 골짜기에서도 묵묵히 향기 나는 일을 한다면 그 역할을 충분히 한 셈이다.”고 고인의 삶을 기렸다.
권 변호사는 자기 것을 챙기고 쌓아두지 못하고, 뭐든 나눠주는, 욕심 없는 사람이었다. 겨울에 등산이라도 갈라치면 그의 배낭은 항상 크고 무거웠다. 집에 있는 장갑이란 장갑, 모자란 모자는 다 넣었다. 일행 중에 안 가지고 온 사람 챙겨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그의 친구인 김진수 변호사는 “용석이 글을 보니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거기엔 욕심을 놓아버린 사람의 맑고 따뜻한 향기가 배어있다. 자동차 말고 달구지 타고 천천히 인생길을 가자던 친구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1년 전 하늘나라로 가버렸고, 나는 그 향기에 취해 가슴이 먹먹하다. 용석아, 고마워. 너의 친구로 살게 해줘서.”라고 말했다.
임순례 영화감독은 “그가 먼 길을 떠나니 비로소 알겠다. 그가 정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평생의 바람대로 많은 이들이 성찰을 통한 행복을 만들어가길 바란다. 권 변호사의 솔직담백한 글은 평생의 반려자인 노지향의 해설이 곁들여져 완벽한 화음이 되고 생의 화엄이 된다.”고 했다.
그는 검사와 변호사로 세속적 권력을 탐할 수도 있었지만, 가진 자들일수록 더욱 낮아지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남긴 ‘거지’란 시엔 그렇지 못한 그의 대학 동창들이나 검사들, 변호사들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마음이 배어있다.
‘바라는 게 많으면 거지 되는 거지./ 거지 되기 싫은데,/ 바람은 왜 자꾸 커가는 건지?/ 희번덕희번덕/ 거지 되고 싶은 사람 왜 이리 많은지./ 꼭대기 올라가도 거지./ 높은데 오를수록 거지 중에 상거지.’
그런 권용석을 두고 ‘북클럽 오리진’ 전병근 대표는 이렇게 썼다.
“검사가 장관은 물론 대통령까지 되는 시대에 그의 행적이란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른다. 퇴직 뒤 로펌행이 가져다줬을지 모를 수입을 생각하면 참 아둔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몸담았던 검찰의 선후배, 동기들이 추문으로 구설에 오를 때마다 덧난 상처처럼 아파했다. 내가 본 그는 조직의 삶에 끝내 매몰되지 않았고, 얻은 것에 자족하지 않았으며, 사회의 아픔을 고민하고 해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려 했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북극성을 향해 나아갔다. 크고 작은 탐욕과 허영에 눈이 멀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잊은 듯한 시대에 내가 본 그의 삶은 언젠가 수련원에서 듣곤 했던 나지막한 타종, 그것이었다.”
고인은 지난해 눈을 감기 직전 아내 노지향 대표에게 ‘그대와 함께 걸은 길, 우리 모두에게 꽃 길이 되길’이란 마지막 글을 남겼다. 이 글은 행복공장 느티나무 아래 돌에 새겨져 있다.
권용석 1주기 추모 및 <꽃지기 전에> 북콘서트와 행복기금마련 토크콘서트가 19일 오후7시30분 서울 마포구 청년문화공간JU동교당 다리소극장에서 열린다.
권용석의 유고집 <꽃 지기 전에>에 실린 조현 기자의 추천사
해피와 토리는 아빠만 보면 좋아 어쩔 줄 몰라했다 . 병원에 입원하느라 홍천 행복공장을 떠나있을때면 해피 토리가 얼마나 애타게 할배 를 찾을 지를 걱정하며 안타까워했다 . 의료용으로 생체실험을 당하거나 도살당할뻔하다 행복공장에 입양된 반려견 해피와 토리의 생애에서 권용석 같은 할배 를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었을까 . 하루 한두번 강가로 할배 와 함께 하는 산책길은 해피 토리에겐 삶의 무서운 트라우마를 벗고 , 온전히 자신을 사랑해주는 할배 의 따스한 눈길 속에서 홍천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그 순간을 즐길 수 있는 , 안락의 시간이었다 . 용석이는 목을 짓누르는 암덩어리를 달고서도 , 해피 토리가 가진 생의 암덩어리를 녹여주는 존재였다 . 홍천에 내려갈 때마다 그 아름다운 산책길에 동행하는 행운을 누렸다 .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만나면 친구가 되기가 쉽지않다고 한다 . 행복공장을 꿈꾸던 그는 수많은 수행 · 수도와 심리치유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해보고 2001 년 쓴 내 졸저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를 읽고선 동갑내기인 내게 ‘ 우리 친구 하자 ’ 며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 보기와는 달리 낯가림이 적지않은 나도 , 취재처에서 만나는 많은 ‘ 잘난 사람들 ’ 과는 결이 다른 ’ 그의 순수함에 함께 녹아들었다 . 행복공장의 명상프로그램 진행자로 내려갈때마다 우린 함께 강가를 걷고 뒷산을 오르며 죽마고우들과도 나누기어려운 삶과 죽음에 대한 속마음을 나눴다.
해피와 토리의 목줄을 하나씩 잡고 가면서 용석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남지 았았다는 것을 직감한 자만이 낼 수 있는 용기로 속내를 풀어냈다 . 산책길을 걸을 때마다 , 혹은 홍천읍이나 양덕원의 버스 정류장이나 용문의 기차역까지 마중나오거나 배웅해주면서도 암과 죽음 , 아내와 아들 , 행복공장에 대해 그가 했던 진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기억력 나쁜 내게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않고 , 이렇게 부부에 의해 글로 남겨졌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 큰 축복인지 모른다 .
용석이는 기질적으로 남을 모질게 족쳐서 , 없는 죄를 만들고 , 감옥에 보낼 사람이 못됐다 . 그런 그였으니 검사를 하면서 , 얼마나 부대꼈을까 . 담배 연기 속으로 그는 고운 심성을 감추고 싶었는지 모른다 . 만약 그가 사회복지사나 학교 선생님이 됐더라면 마음과 몸이 덜 부대끼지않았을까란 생각이 들만큼 그는 고운 사람이었다 .
어렵게 공부해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 검사가 되고 , 변호사가 되고 , 행복공장까지 세워 소년같은 꿈을 꾸는 순간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암선고를 받았을때 얼마나 억울하고 ,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 암에 대한 분노와 한탄과 자조로 보냈을법한 10 년의 세월을 그는 그렇게 보내지않았다 . 나는 행복공장의 명상프로그램을 통해 자주 삶의 고난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 나찾사란 치유 프로그램에서는 죽음명상을 이끌기도 한다 . 그런데 용석이야말로 10 년동안 ‘ 리얼죽음명상 ’ 을 했다.
그는 암과 죽음을 회피하지않고 , 때론 싸우고 , 좌절하면서도 다시 일어서고 , 때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도 고통에만 매몰되지않았다 . 값없이 허비해버릴 시간이 없었던 그였던만큼 그는 가족을 사랑하고 , 행복공장에 온 소년원과 6 호처분 아이들 , 은둔청소년의 벗이 되어 삶을 즐겼다 . 아내 노지향 원장과 아들 예철이와 이별을 감당해야했음에도 죽음의 가위에만 눌려있지 않고 , 그 두려움과 불안 , 아픔 속에서도 아낌없이 서로 사랑하고 , 행복을 나눴다 . 더구나 자신들의 고통에 짓눌려있지않고 , 행복공장에 온 소외된 이들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돌보는 이 가족의 모습은 슬프고도 아름다웠다.
많은 사람들이 50 대에 떠난 용석이의 삶을 비통해하지만 , 그는 오히려 비통해하는 우리를 위로하고 사랑하며 이런 뜻밖의 선물을 남겼다 . 그리스의 비극이 카타르시스를 선물했듯이 슬픈 동화같은 용석이와 노지향 원장의 글을 읽다보면 슬퍼지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환해진다 .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 해맑은 미소를 보내며 행복을 응원하는 용석이가 느껴진다.
출처: 한겨레 조현의 휴심정 https://www.hani.co.kr/arti/well/people/10921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