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겨레신문] "득실 셈하지 않은 헌신…부끄러움 잊은 시대의 타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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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행복공장 설립자 고 권용석 변호사를 추억하며
이 글을 쓰는 일을 처음엔 주저했다. 나는 고인을 안 지가 고작 5 년 남짓이기 때문이다. 훨씬 오래 가까이에서 본 누군가가 그의 면모를 더 소상히 전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유는 뒤에 붙이겠다. 우선 내가 본 대로 그의 모습을 적어볼까 한다.
살다 보면 앞만 보고 뛰는 사람, 자족하며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도 살피며 가는 사람이 있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손 내미는 사람이다. 권용석 형이 그런 경우였다. 첫 만남부터가 ‘기연’이었다. 2016년 내가 퇴직한 뒤 북극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일행 중에 한 가족이 있었다.(이미 그는 갑상선암 투병 중에 큰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가족 여행 중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알고 보니 같은 학교 법대 선배였다. 검사로 10년 일하다 나와서 지금은 강원도 홍천에서 행복공장 수련원(성찰공간 빈숲)을 짓고 ‘성찰 프로그램’ 과 청소년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검사 시절 격무에 시달리다 문득 교도소 독방에 들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걸 본떠 수련원을 지은 것” 이라며 한번 오라고 했다. 나는 나대로 ‘북클럽 오리진’ 이라는 지식문화 확산 프로젝트를 막 시작한 터였다. 그뒤 행복공장에서 북캠프도 열며 많은 사람들과 ‘성찰과 나눔의 시간’ 을 함께했다. 2평짜리 독방 형태의 수련원은 마음의 쉼터를 찾는 이들 사이에 명소가 되었고 외국 언론들도 찾아왔다. 그는 부인 (노지향 극단 ‘연극공간 - 해’ 대표)과 함께 소년원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쳐 무대에 올리는 치유 사업도 병행했다. 특히 불우한 환경의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직함은 이사장이었지만 하는 일에서는 충직한 머슴이었다. 행사 참가자들과 논두렁을 함께 걷고 밤늦게까지 둘러앉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피운 수련원 마당 모닥불에 자신의 새로운 다짐을 적은 쪽지를 태워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올 생각을 했다. 한번은 국회의원들에게 성찰을 호소하는 ‘손거울 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참 순진하다’ 는 생각을 그라고 안 해 봤을까. 득실을 셈하지 않고 할 일을 향해 걸어간 사람이었다. 그 사이 병마와의 싸움은 처절했지만 늘 웃는 얼굴이었다. 걱정하는 사람이 멋쩍을 정도였다. 그 넉넉한 웃음은 뒤늦게 찾은 소명과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연소할 때 누릴 수 있는 남모를 기쁨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힘겨웠을 투병마저 그에겐 소명의 완수를 위한 사소한 절차쯤으로 보였다.
그의 나머지 삶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가신 이에게 혹여 누가 될지도 모를 허술한 회고의 글을 적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을 떠받치는 숨은 선의와 헌신들에 대한 또 한 줄의 증언이 될까 해서다. 검사가 장관은 물론 대통령까지 되는 시대에 그의 행적이란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른다. 퇴직 뒤 로펌행이 가져다줬을지 모를 수입을 생각하면 참 아둔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몸담았던 검찰의 선후배, 동기들이 추문으로 구설에 오를 때마다 덧난 상처처럼 아파했다. 내가 본 그는 조직의 삶에 끝내 매몰되지 않았고, 얻은 것에 자족하지 않았으며, 사회의 아픔을 고민하고 해결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려 했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북극성을 향해 나아갔다. 크고 작은 탐욕과 허영에 눈이 멀어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잊은 듯한 시대에 내가 본 그의 삶은 언젠가 수련원에서 듣곤 했던 나지막한 타종, 그것이었다.
전병근/북클럽 오리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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