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국일보] 인간적 신뢰 쌓으면 연극은 훌륭한 내면 치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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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연극 도입 20년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해' 노지향 대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공간-해'의 노지향 대표는 "내면의 문제를 연극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진: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연극은 다른 어떤 예술 분야보다도 현실과 닮아 있어서 그런지 특히 강력한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고요. 연극으로 치유한다면서 더 상처를 줄 위험도 있어요. 쏟아낸다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연극 이전에 인간적인 신뢰가 매우 중요합니다.”
‘치유연극’을 도입해 20년 가까이 수많은 삶에 희망과 용기를 준 연극연출가가 있다. 소년원을 찾아가 원생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고, 이주노동자와 기지촌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연극으로 만들었다. 참가자들이 직접 배우로 참여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지난 4월 ‘아시아 필란트로피(박애) 어워드’(APA)에서 여성 필란트로피스트상을 받은 극단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 공간-해(解)’를 이끄는 노지향(55) 대표 이야기다. APA는 비영리 부문 전문가 100명이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고 재능기부로 참여해 사회에서 묵묵히 일하는 숨은 영웅들을 뽑는 시상식이다.
노 대표는 최근 서울 관악구 남현동에 있는 비영리단체 ‘행복공장’ 사무실에서 만나 “누군가를 바꾼다기보다는 진정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고민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복공장은 노 대표의 남편인 권용석 법무법인 대륙아주 변호사가 설립한 단체로 성찰과 나눔을 통한 행복의 길을 모색하는 성찰 사업과 나눔 사업을 하고 있다. 노 대표는 상임이사로 일하며 극단 업무와 병행하고 있다. 연극공간 해와 행복공장 모두 비영리단체여서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노 대표가 치유연극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6년 브라질의 세계적인 민중극 연출가 아우구스투 보알의 내한 워크숍에 참여하면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연극으로 인생의 항로를 틀었다. 중앙대 연극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우연히 보알을 만났다. “신세계였어요. 종교적인 체험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내가 찾던 게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단지 참가자들끼리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는데도 아무런 이유 없이 억누를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오더군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가면이 벗겨지는 느낌이었죠.”
워크숍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끼리 극단을 만들었다. 연극공간 해의 시작이다. 극단을 만들고 1년여 지나 처음 문을 두드린 곳이 서울소년원이다. 하지만 소년원 아이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치유연극 프로그램에 참가한 아이들도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소년원에서 열리는 수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노 대표는 “아픈 상처를 드러내기 싫어 화를 내는 아이들도 많은데 한번 시작하면 끝도 없이 터져 나온다”며 “엄마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만 가득했던 아이가 연극을 마친 뒤엔 엄마에 대한 애정을 조금씩 느끼며 균형을 잡기도 한다”고 말했다.
연극을 준비하는 수개월의 시간은 참가자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로 채운다. 대본 작업은 따로 하지 않고 역할과 내용을 조금씩 바꾸다가 공연 직전에 대략의 극본을 정한다. 모든 참가자의 이야기를 다 섞는 건 아니지만 누구 한 명도 소외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고 한다. 연극이 끝나면 관객이 참여할 기회를 준다. 연극에 나타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관객이 직접 제시하는 것이다. 노 대표는 “우리 모두에겐 내면의 억압이 있고 나름의 문제가 있는데 그런 문제 상황을 풀어내는 데 연극이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소년원생들과 함께 만드는 공연은 ‘아름다운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매년 두 차례 열린다. 올해 3월부터 매주 워크숍을 열며 준비한 ‘아름다운 아이들 2016-여름’은 28일 경기 의왕시 서울소년원 대강당에서 열린다. 공연을 마친 뒤엔 부모나 멘토와 함께 원생들이 소년원을 나와 2박 3일간 지내는 프로그램도 있다. 올해는 유독 부모들의 참여가 뜨겁다고 한다.
노 대표의 과제는 자신의 뒤를 이어 치유연극을 계속할 사람을 찾는 일이다. 그는 “20년간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정작 후배 농사는 잘 못 지은 것 같다”며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 만나는 게 평생 사업”이라고 했다. “행복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니까 행복하냐는 질문을 가끔 받죠. 행복감을 늘 느끼면서 살진 않았는데 최근엔 더 확실히 느낍니다. 내가 잘 쓰여서 감사한 거죠. 죽을 때까지 잘 쓰인다면 날마다 행복할 것 같습니다. 더 잘 쓰이면 좋겠어요.”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원문링크: http://www.hankookilbo.com/v/75a8be85600340d89e0620766a0db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