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일보] 1.7평 독방에서 '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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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완 기자의 라르고]
강원도 홍천수련원 5박 6일간의 '나홀로 수행' 체험기
스님이 경쇠를 채로 치자 '삐잉'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렸다. 좌복(坐服·불가에서 쓰는 방석)에 앉아 있던 수행자들이 가만히 허리를 폈다. 마주 앉은 스님이 입을 뗐다.
"수류(水流)라. 강에 흐르는 물이 지나쳐 온 꽃밭을 아쉬워합니까. 예쁜 노루와 나눴던 입맞춤을 그리워합니까. 아니면 나중에 웅덩이에 맴돌까봐 걱정합니까. 물은 새로운 것을 만나며 그저 흐를 뿐입니다. 생생하게 흐릅니다." 좌중의 안색이 연꽃 봉오리처럼 펴질 듯했다.
일요일인 지난달 24일 오후 2시 강원 홍천군 용수리에 있는 홍천수련원에 '수행자' 8명이 모였다. 30세인 기자를 제외하면 다들 40대 이상이었다. 홍천 기온이 영하 19도까지 내려갔고 제주도엔 1m 넘게 눈이 쌓였다고 했다. 폭설과 강풍으로 여행객 8만명이 제주도에 발 묶여 있었다.
그날 이들은 자기 돈을 내고 스스로 한자리에서 묶으러 왔다. 멀리는 전남 해남에서 왔다. 7박 8일간 좁은 독방(獨房)에 갇혀 '무문관(無門關)' 수행을 하려는 것이었다. 무문관이란 출가한 스님이 절방에 홀로 들어가 밖에서 문을 잠그고 길게는 수년간 나오지 않고 화두(話頭)에 정진하는 걸 뜻한다. '아마추어 수행자' 8명 중 불자(佛子)가 6명이었다. '행복공장'이 운영하는 이 참선 프로그램에 무교(無敎)인 기자가 5박 6일간 참여했다.
이날 오후 1시 30분 홍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수련원에서 나와 기다리던 차에 올라탔다. 차 안에는 아담한 키의 중년 여성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목례를 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검은색 점퍼를 입은 그는 배낭을 끌어안고 있었다. 입을 앙다물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동승해 이동하는 20분이 적막했다. 차창 밖 홍천강이 허옇게 얼어 있었다.
1.7평 독방에 일주일간 갇히다
수련원에 닿아 군청색 수련복으로 갈아입고 이름 위에 '하1601정17205'이라고 적힌 명찰을 왼쪽 가슴에 달았다. '하 1601'은 '하(下)층 독방 2016년 1월'이며 '정 17205'는 '17번째 정규 프로그램 205호실'을 뜻한다. 거울을 보니 흡사 수의(囚衣)였다. 우선 강당에 빙 둘러앉아 돌아가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다 같이 산책을 나가 두껍게 언 개천 위에서 눈을 보도독 보도독 밟았다. 주위 구릉에 회갈색 사시나무 숲이 둘러서 있었다.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인 숙소동엔 옷가지, 세면도구, 필기구와 손목시계 정도만 들고 갈 수 있었다. 휴대전화는 물론 책도 반입할 수 없었다. 다른 모든 소지품은 사물함에 보관해야 했다. 전기 면도기는 "소리가 다른 사람 수행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층에는 강당과 샤워실, 2·3층 중앙복도 양쪽에 1.7평짜리 독방 28개가 배치돼 있었다. 산책과 오리엔테이션에 이어 강의를 듣고 샤워를 마치자 사위가 새카매졌다. 205호실에 들어가 있는데 복도의 괘종시계가 오후 8시를 알렸다. 누군가 밖에서 놋쇠그릇 같은 것을 나무 채로 세 번 때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누군가 방의 잠금장치를 밖에서 돌려 문이 '딱' 소리를 내며 잠겼다. 이제 금방 밥을 먹었는데 '딱' 소리에 허기가 졌다.
직사각형 방은 길이로 다섯 걸음, 너비로 두 걸음이면 끝이었다. 법명으로 불광월(佛光月)을 쓰는 한 여성 수행자(63)는 "보통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를 외는 육자(六字) 염불로 수행해 왔는데 독방에서 몸도 풀 겸 한 걸음에 한 자씩 외면 딱 좋았다"고 말했다. 방 안에는 앉은뱅이 탁자와 플라스틱 옷장, 붙박이 이불장이 있었다. 세면대와 수세식 변기도 방마다 있었다. 변기는 커튼으로 가릴 수 있었다. 창문은 가로 80㎝ 세로 2m 정도로 탁 트여 있었다. 그러나 안전상의 이유로 창문은 15㎝ 정도밖에 열리지 않았다. 흰색 벽지로 도배된 방은 허전하고 막막한 느낌을 줬다.
첫날과 마지막날을 제외하고 하루 일과는 동일했다. 오전 6시가 되면 방송으로 5분간 오르골 음악이 울렸다. 익숙한 멜로디는 일본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목마'였다. 108배를 인도하는 남자의 음성이 40분간 계속되는 '108배 방송'을 들으며 108번 절을 했다. 오전 8시엔 문 아래쪽 가로 40㎝세로 30㎝ 크기의 여닫이 배식구로 아침 식사가 들어왔고, 오후 12시 30분엔 점심과 저녁을 함께 줬다. 밥과 국은 공기에, 찬은 플라스틱 통에 담겨 들어왔다. 오후 3시가 되면 방문을 열어줬는데, 원하는 사람에 한해 해남 미황사 주지 금강 스님(50)의 참선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1~2시간 걸리는 강의가 끝나면 샤워실에서 씻고 다시 독방으로 들어갔다. 이틀째부터는 오후 6시에 방문이 또 잠겼다. 정해진 취침시간은 없었다. 옆방 코 고는 소리를 듣다보면 잠이 잘 왔다.
108배 통증… 넷째날부터 아프지 않아
둘째날 아침 생전 처음 해본 108배(拜)는 아팠다. 금강 스님은 "절할 때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자기 몸에만 집중하라"고 했는데, 실제 온몸이 아파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우선 무릎을 펴고 접을 때 '짜자작' 소리가 나며 아팠다. 허리와 발목도 아프고 이마를 자꾸 좌복에 찧으니 머리에 피가 몰렸다. 마지막 절을 올리면서는 '나를 힘들게 한 모든 사람'의 복(福)을 기원했다.
첫 108배의 후과(後果)는 셋째날에야 나타났다. 온몸이 쑤셔 가만히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불교에서 절은 신체의 다섯 군데(양 무릎·양 팔꿈치·이마)를 땅에 닿게 해 '자신을 무한히 낮춘다'는 의미가 있다.
대기업 임원을 퇴직한 수행자 박모(55)씨는 “절 통증 때문에 셋째날엔 스님 앞에 앉아 있어도 강의가 귀에 안 들어오고 참선도 안 됐다”며 “절 통증은 다시 절로 푸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계획에 없던 절만 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씨는 8일 동안 5000배를 넘겼다고 했다. 실제로 넷째날부터는 절을 해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참선 중에 드는 망상을 절로 쫓기도 했다.
채식은 예상했지만 둘째날 저녁식사를 받았을 때는 착오가 있나 싶었다. 플라스틱통 뚜껑을 여니 오이 4조각, 파프리카 4조각, 고구마 반 개, 바나나 반 개가 전부였다. 이튿날 저녁은 당근과 브로콜리, 바나나였다. 아침엔 매일 죽만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셋째날부터는 시장기를 느낄 수 없었다. 수행을 마칠 무렵엔 오후 특식으로 나온 떡 두 덩어리에 배가 차기도 했다. 법명 무아행(無我行)을 쓰는 60세 여성은 “배가 차면 참선에 방해가 돼 화두 삼매(三昧)에 빠졌던 수요일은 아예 단식하고, 그 전후엔 밥 대신 죽 3분의 1공기만 먹었다”고 말했다. 법명 벽운(碧雲)을 쓰는 49세 여성은 “수행하는 동안 절 3000배를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밥심’으로 버텼다”고 말했다.
초보 수행자는 數 세면서 참선
무문관 수행은 간화선(看話禪)의 극치다. 간화선은 여러 번뇌에 둘러싸인 ‘참 나’의 모습을 깨닫기 위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수행법이다. 화두는 어지간해서는 의미를 잘 알 수 없다. 예컨대 한 제자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물었을 때 그 스승이 “마른 똥 막대기니라”고 답하는 식이다. 초보 수행자에게는 수식관(數息觀) 수행으로 번뇌를 몰아내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수식관이란 호흡에 맞춰 속으로 숫자를 세는 참선 방법이다. 수를 세는 동안 잡생각이 들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집중력이 길러진다고 했다.
초반엔 내적 ‘사상(思想) 투쟁’을 겪었다. ‘유능해지면 좋겠다’ ‘집을 사고 싶다’ 같은 욕심이 번뇌라면, 왜 그것을 버려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교의 가르침은 허무주의처럼 느껴졌다. 마침 금강 스님이 “청산을 감싼 흰 구름을 불어내듯 번뇌를 걷어라”고 가르친 것을 두고 “스님, 제 번뇌는 청산을 감싼 구름이 아니라 사과를 감싼 껍질과 같아서 저 자신과 하나입니다”고 대꾸했다. 스님은 이렇게 하교(下敎)했다. “자연스러운 욕심은 이미 나의 일부입니다. 번뇌라는 건 그 욕심 때문에 과거에 매여 판단하거나 미리 앞서 걱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날이 되니 금강 스님이 화두를 제시했다. 중국 당나라 때 승려 조주(趙州·778~897) 선사의 ‘무(無)자 화두’였다. 한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선사가 “무(無)”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금강 스님은 “모든 사물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불가 가르침의 기초”라며 “승려는 엉뚱한 질문을 하면서 내심 선사에게 ‘부처의 진리를 보여 주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므로 그 대답인 ‘무’ 자를 깊이 궁리하다 보면 부처의 도에 대해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아행’ 수행자는 첫날 독방에 들어가 8일째 수행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방 밖에 나오지 않았다. 158시간 동안의 묵언 정진이었다. 그는 “그럴 생각으로 온 건 아닌데 첫날부터 마음이 편안해져 자연스럽게 계속 혼자 있었다”며 “넷째날쯤 되자 ‘쨍’하는 맑은 느낌으로 화두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음속에 서광이 비치는 느낌이냐”고 물었더니 한참 생각하다 “그저 시원했다”고 답했다. 중국 남송 때의 승려 무문혜개(無門彗開·1183~1260)가 지은 책 ‘무문관’의 구절을 인용해 “360개 뼈마디와 8만4000개 털구멍으로 무(無) 자를 관통하는 느낌”이라고도 표현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기자를 제외하고 최연소 수행자가 48세였다. 20·30대 참가자가 없는 것에 대해 금강 스님은 “젊은 사람들은 단체 참선 프로그램에 호기심을 갖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처럼 단독 수행 프로그램은 초심자들에게 부담스럽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행에 자신이 붙은 중년 이상의 불자(佛子)들이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문종순 동산불교대학 기획실장은 “요즘 전국에 많이 있는 선방 참선 프로그램에선 지도법사의 가르침만 충실히 좇으면 되지만, 무문관 수행은 원래 출가승이 굳은 다짐으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면벽(面壁)하던 방식이기 때문에 참선 외에 극기(克己)의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여성 수행자들은 참선을 통해 가족과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한 수행자(68)는 “아들이 운동을 잘해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내가 줄곧 반대해 꿈을 못 이뤘다”며 “내 고집과 욕심으로 아들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막은 게 아닌지 계속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법명 가은(伽隱)을 쓰는 60세 수행자는 “재작년 돌아가신 어머니와 성격이 반대여서 생전에 많이 미워하고 원망했었다”며 “그러나 9년 전 반야심경을 읽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이치를 배운 뒤 병상의 어머니와 화해했다”고 말했다. ‘벽운’ 수행자는 “내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직진 스타일’인 걸 알지만 그걸 고치라는 대학생 아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참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아행’ 수행자는 독방 창 밖 소나무 두 그루 가지가 서로 얽힌 것을 보고 “부부의 참모습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직업을 보면 전·현직 교사가 셋이나 됐다. 12년 전 강원 철원군에서 근무할 때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교과서로만 가르쳐왔던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철불’을 직접 가서 본 것이 인연이 돼 불자의 길을 걸었다는 ‘여여행’ 수행자는 “작년 초 인간관계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 참선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퇴직 교사인 ‘무아행’ 수행자는 “현직 교사는 방학 때 비교적 한가하고 전직 교사는 공무원연금을 받기 때문에 이런 1주일짜리 프로그램에 참가할 여유가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사단법인 ‘행복공장’은 2013년 홍천수련원을 지은 뒤 2014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4번 무문관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그간의 모든 참가자 43명 중 최연소는 29세 여성, 최고령은 68세 여성이었다. 중도 귀가자는 한 명 있었다. 그마저 수행 기간 중 상(喪)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노지향 행복공장 상임이사는 “일에 치이는 사람들이 일주일간이라도 ‘독방 감옥’에서 쉬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편견과 아집, 번뇌로 어지럽기 전의 마음 상태를 불가에서는 흐르는 물이나 피는 꽃에 비유한다. 지난 1992년부터 2010년 입적(入寂) 때까지 강원도 오대산의 수류산방(水流山房)이란 오두막에서 지낸 법정(法頂)은 수필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은 다르다.”
해남에서 소금장사를 한다는 ‘벽운’ 수행자는 첫날 눈밭에 꽃을 그렸었다. 한 발로 중심을 잡고 몸을 돌리며 다른 발로 꽃잎 문양을 찍었다. “개나리 를 닮았다”고 하자 웃으며 “우리 집 앞 멍청한 개나리가 겨울인 줄도 모르고 피었다”고 말했다. 여드레째이자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홍천에서 헤어지고 사흘 뒤 전화로 개나리 안부를 물었다. “응, 이미 핀 건 얼어서 말라 죽구, 꽃봉오리는 또 올라와.” 그날 낮 서더리탕으로 해장을 했다. 쨍 하게 매운 국물이 오장육부를 흘렀다. 환속(還俗)의 맛이었다.
권순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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